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지음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독서토론 모임의 지난 발제 책이기도 하다. 독서토론모임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좋은 도서를 꾸준하게 추천 받을 수 있다는 것. 바쁜 일상으로 드물게 토론에 참여하고 있지만 토론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모임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가장 크게 불러일으키는 건 좋은 책을 꾸준히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 역시 책 제목에서 주는 기대감과 흥미로움을 그대로 만족시켜주는 도서였고, 그 만큼 즐거운 토론이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대해 원론적인 상념들을 얼마나 가져보았는가? 분명 지금의 나처럼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 직장인 혹은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사람에 대해, 인간에 대해 그리고 하나의 사회구성원으로서 가질 수 있는 성원권에 대해 다방면으로 의견을 제시하며 많은 논점을 던져준다.
제1장 사람의 개념 중 '태아'
인간의 태아는 분명히 인간이지만,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그렇다. .... 출생이란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바깥으로 나와서 모체가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 전까지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는 태아를 죽이는 행위가 살인죄를 구성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 태아의 시신은 특수한 폐기물로 취급되며 산모와 그 가족은 이 폐기물에 대해 유족이 망자의 시신에 대해 갖는 의례상을 권리들을 주장하지 못한다. .... 이는 "소개 받은 상대는 자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앨리스가 붉은 여왕의 식탁에 초대되었다. 양고기가 나오자 여왕이 말한다. "쑥스러워하지 말아요. 내가 소개하죠. 앨리스, 이쪽은 양고기예요. 양고기야, 이쪽은 앨리스란다." 그러고서 앨리스가 양고기를 자르려 하자 여왕은 소리친다. "안돼요! 소개받은 상대를 자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에요!" - p.33
작가는 '인간'과 '사람'의 차이를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되었는가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모체의 일부에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인정받기 전까지 태아가 죽어도 사람이 죽은 것과 동일하게 보지 않은 이유가 이와 같다. 지금은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부여받고 출생 등록을 진행하게 되지만, 책에서 나온 바와 같이 태어나서 100일 안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그 시절엔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난 이후에 이름을 명명했던 것을 보면 '사람'으로서 인정되는 것에 대한건 사회가 계속해서 발전함에 따라 시기가 앞당겨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낙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로서는 낙태행위 자체가 살인이라고 바라보는 게 과하다라고 뒷받침할 수 있는 하나의 의견으로 제시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제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중 '외국인의 문제'
외국인은 여기서 어떤 현실적인 장소와의 연관도 내포되지 않으며, 단지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를 유보하기 위한 배제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 p.70
'외국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얼마나 광범위하에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풀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작가가 해석하는 외국인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흥미롭다. 단순히 타국가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성원권을 부여할 수 없는, 부여하지 않기 위한 '배제의 기호'라고 표현하는 글귀를 보고 어쩜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폭넓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각 국에 따라 외국인도 사회구성원으로서 권리를 표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할 수 있지만 실제가능여부나 방안보다는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함축적으로 지니고 있는 다양하고 많은 표현과 의미를 볼 수 있었다.
제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중 '오염의 메타포'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 p.73
책의 꽤 많은 페이지를 인종차별 그리고 인정투쟁과 관련한 성원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차별과 그러한 대우들이 이전 시대에서는 만연하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성행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낯섬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도 물론, 사람이 환경과 상황 안에서 세뇌되어 온 인식이란게 너무나 무섭다라는 점에서 다시금 소름이 끼친다.
제3장 사람의 연기/수행 중 '가면과 얼굴'
우리는 얼굴을 개인이 맡은 역할이나 그 역할에 대한 그 사람 고유의 해석, 혹은 연기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자기 이미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얼굴은 그처럼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 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고 못 본 체할때, 한마디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 p.90
아이씨 이거 진짜 사회생활에 진절머리 난 사람은 이해하는 루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받아들인대로 독자 누구나 똑같이 해석을 하리란 법은 없지만 어쨌든 내가 받아들인 바는 이러하다.
제4장 모욕의 의미 중 '굴욕에 대하여'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굴욕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쿨하다'와 '찌질하다'이다. 신인 시절의 굴욕 사진을 들킨 연예인은 심야 토크쇼에서 성형 사실을 쿨하게 인정한다. 그러면 추락하던 인기가 다시 올라간다. 여기에 비해, 악플을 단 네티즌을 고소하는 것은 찌질한 방법이다. 그런 식의 대응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쿨하지 않으면 찌질해지는 세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 p.160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모욕이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고없이 실직을 당하거나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방을 벗어날 수 없는 등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굴욕을 느끼지만 모욕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상황이나 누군가가 모욕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굴욕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되고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로 탓한다.
위 인용글을 읽으면서 최근 화제가 된 '1일1깡'이 떠올랐다.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비가 쿨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깡'에 한정되있던 밈 현상이 과거의 레이니즘, 힙송 등으로까지 번져가며 새롭게 비의 인기가 다시 치솟고 있다. 찌질함이 아닌 쿨함의 좋은 예 최신버전이 아닌가.
평소보다 많은 인용글을 적었다. 독서를 하면서 기록해두고 싶은 문장과 문구가 가득했다. 동갑내기 전 직장 동료를 간만에 만나며 책을 선물했다. 사고방식이나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서 많은 공통점을 보였던 만큼 나처럼 흥미롭게 책을 볼 것이라 생각하니, 그녀가 빨리 이 책을 읽어줬으면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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